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루크 시대 (문단 편집) == 문화 발전 == [[신석기]]에 해당하는 우바이드 문화에서 우루크 시대로 넘어오며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대표적으로 [[농업]]만 봐도 '''제2의 농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할 정도이다.[* 제1의 농업혁명은 쌀을 처음 재배해 키우기 시작한 '신석기 혁명'을 의미한다.] 이전까지는 하나하나 손으로 고랑을 파고 밭을 갈았지만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 '''[[쟁기]]'''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했다. [[낫]]의 보급과 함께 이전 우바이드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확이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관개 기술도 진전을 보여 하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거대한 대평원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자연적인 강 바로 근처에서만 겨우겨우 농사를 지었다면 우루크 시대에는 아예 물길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밭에 물을 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농업의 발달과 곡물 수확량의 증가는 곧 인구 증가와 [[도시화]], 도시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목축]]'''이 제대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야생 나귀가 처음으로 [[당나귀]]로 길들여졌는데, 당나귀는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길들여진 말짐승이었고 얼마가지 않아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로 자리잡았다. 인간의 약 2배나 되는 물건을 수월하게 옮길 수 있었을 뿐더러 먹는 양도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길들여진 상태였던 [[양]]과 [[말]], [[소]]의 개량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냥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 하나씩 도축하면서 고기만 얻으려 했다면, 우루크 시대에는 양털이나 가죽, 우유, 모피나 탈것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야 동물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깨달으며 진정한 의미의 목축업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게 되면서 대량으로 물건들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했다. [[그릇]] 역시 생활에 필수적인 물건이었는데, [[물레]]의 등장으로 그릇과 항아리, 도자기 따위를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이 가능해졌다. 더이상 손만으로 느리게 그릇을 성형할 필요가 사라졌고 만드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빨라졌다. 도자기 겉에 화려한 장식을 넣는 단계까지는 못갔지만 마름모꼴이나 격자무늬를 넣어 기초적인 장식을 시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역시 개선되었고 대규모로 도자기를 제작하던 도기장 유적이 발견된 적도 있다.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도자기 대량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파일:Tableta_con_trillo.png]] 기원전 3000년대에 제작된 [[키쉬]] 태블릿.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수많은 발명품들이 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말할것도 없이 '''[[글쓰기]]의 발명'''이다. 우루크 시대 중기에 처음 등장했고 후기와 [[젬데트 나스르 시대]]를 통하며 더욱 발전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쐐기 문자]]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쐐기 문자는 [[문자]]라기보다는 기호와 상징을 애매하게 섞어놓은 것에 더 가까웠다. 엄밀히 따지면 쐐기 모습이라기보다는 물건의 모습이나 기호와 비슷해서 '쐐기 문자'라고 부르기조차 약간 모호하다. 극초기의 글쓰기는 문학이나 시 따위가 아니라 물건 계산이나 [[영수증]], 거래 대금 지급, 회계 관리 따위에 사용할 용도였다. 당연히 구어체를 그대로 옮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우루크 시대에 만들어진 극초기 단계의 문자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중에는 '''세계 최초의 문자로 발전'''하니 그 중요도만큼은 결코 뒤떨어진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바이드 문화의 끝자락에 금속 중 그나마 가장 다루기 쉬운 [[구리]]를 이용하기 시작했으나 제대로 쓰게 된 것은 '''[[청동기]]'''에 해당하는 우루크 시대이다. [[야금술]]의 발전으로 수많은 금속제 물건들이 만들어졌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남은 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초기적인 형태의 [[합금]]도 등장했다. [[비소]]를 섞은 비소 청동,[* 느낌이 오겠지만 작업자가 청동을 제조하는 도중 비소 중독으로 사망하기도 하는 등 매우 위험한 물질이었다. 비소 청동은 주석 청동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고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석 합금 기술이 개발된 후 사라졌다.] [[납]]과 구리의 합금 등이 등장했지만 기원전 2000년기까지 [[주석]] 청동은 발견하지 못했다. 구리를 포함한 금속들이 중요해지며 장거리 무역이 떠오르기도 했다. 질좋은 금속은 대부분 저멀리 [[아나톨리아]]나 [[페르시아]] 지방에서 산출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수입해와야 했기 때문이다. 먼길을 통해 수입하다보니 금속 값은 당연히 비쌌고, 금속용품은 결코 아무나 쓸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다. 건축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움집]]이나 오두막 따위를 짓다가 제대로 된 직육면체 반듯한 건물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말린 진흙 벽돌을 쌓아서 지었고, 후기에 들어서는 색색의 [[테라코타]] 벽돌로 장식하는 기법이 유행했다. [[역청]]으로 벽돌을 방수처리하거나 [[석고]]를 접착제로 사용해 벽돌을 붙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시대의 벽돌을 크게 테라스나 기단을 쌓을 때 쓰는 큼직큼직한 벽돌 '파트젠'과, 상대적으로 작고 세세한 장식을 쌓을 때 쓰던 조그마한 벽돌 '리엠첸'으로 나눈다. 벽돌들을 표준화해서 크기를 각각 달리했기에 이전보다 훨씬 장식을 풍성하게 붙이는 게 가능했다. 우루크의 건축기술은 나날로 발전해서 작은 채색 테라코타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여서 화려한 [[모자이크]]를 구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점토와 흙 벽돌 뿐만 아니라 돌을 잘라 쓰기도 했다. 우루크 서쪽 50km 떨어진 지점에는 거대한 석회암 광산이 있었기에 원하면 바로 캐다 쓸 수 있었던 덕이었다. [[바퀴]]가 우루크 시대에 최초로 발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바퀴 자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우루크 시대에 나왔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바퀴보다는 [[썰매]]를 끌거나 통나무를 굴려서 짐을 옮겼다. 어쨌든 바퀴의 등장으로 예전보다 훨씬 거대한 양의 짐을 쉽게 옮길 수 있게 되었고 기원전 3000년대 초에는 [[전차]]가 등장했다. 하지만 바퀴살은 기원전 2000년대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냥 통나무를 잘라 큰 원판 모양의 바퀴에 불과했다고 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바퀴를 이용한 수레보다는 당나귀에 짐을 실어옮기는게 더 대중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 외에 갈대로 만든 나룻배로 수로를 따라 물류를 운반하기도 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사회가 갈라지며 [[정치]]에서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우루크 시대의 대표적인 에안나 신전은 그 면적이 4,600제곱미터에 달한다. 바로 직전 우바이드 문화권에서 지은 1,000제곱미터 에리두의 4번 사원에 비하면 그 크기가 매우 커졌다. 더 거대한 건물을 지을만큼 중앙집권적인 사회시스템이 구축되었다는 증거로, 왕과 사제, 귀족과 같은 사회 엘리트층이 출현해 사회가 확고히 피라미드형으로 나뉘었다. 우루크 유적만 봐도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저택들이 모여 있지만 외곽으로 나갈수록 좁아터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게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사제와 왕, 귀족 등 엘리트층 사이의 구분이 확실하지는 않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력한 군주나 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신전과 왕궁이 지어졌다. 신전은 [[수메르어]]로 '큰'(GAL) '집'(É), 곧 '''에갈(É.GAL)'''이라 불렀으며, 처음에는 왕궁을 겸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기원전 4000년대와 3000년대를 거치며 왕궁이 점차 신전에서 분리되었고, 신전과 왕궁이 분리된 이후, 두 세력 사이에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의 도시들은 서로 영토를 확장하며 경쟁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터지면 도시인들은 총회에서 임금이 아닌 '큰'(GAL) '사람'(LU), 곧 '''루갈(LUGAL)'''을 뽑아 전쟁 지도자로 앉혀 전쟁을 치렀다. 우루크 시대 예술의 특징은 '''[[인본주의]]''' 성향이 조금씩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나 [[고대 그리스]]의 그것에 비하면 비교조차 불가능하지만 직전에 비하면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는 경향이 훨씬 강해졌다. 예전에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 의존하며 사물과 자연현상에 의탁했다면,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하거나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등 인간에 더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유물들이 '원통형 인장'이다. 독특하게 고대인들은 이 원통형 인장을 젖은 점토판 위에 굴려서 도장을 찍었는데, 이 인장들이 죄다 사회 엘리트층들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새겨져있는 모습이다. [[분류:메소포타미아 문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